아이디어를 경험화하는 사람

디자이너가 뭐하는 사람들이야?라는 질문을 받으면 생각보다 답하기 어렵더군요. 브랜드, 그래픽, 편집, 광고, 영상, 게임, 제품, 공간, 무대, 자동차, 건축, 설계, 소프트웨어, 패션, 사운드까지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디자인의 개념이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죠. 각 영역과 산업별로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정의하는 말들도 수백가지는 넘을 것입니다.

‘디자인(設計, design)이란 주어진 목적을 조형적으로 실체화하는 것으로, 의장(意匠)이나 도안을 말한다.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지시하다·표현하다·성취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라틴어의 데시그나레(designare)에서 유래한다.’라는 지식백과에 나온 사전적 정의는 요즘 우리가 하고 있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다 설명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당시 디자인에 대한 정의는 산업화 시대의 도구로써 특히 제품 디자인에 한정되어 많이 사용되었으니까요. 이제는 브랜드 정체성을 ‘디자인’하고 조직 문화를 ‘디자인’할 정도로 디자인에 대한 개념의 폭이 넓어진 상황에서는 너무 작은 정의로 보입니다.

그러면 요즘 시대의 디자인, 디자이너를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요? 저는 그 정의의 시작이 ‘아이디어’라는 말에서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분야가 어떻든간에 디자인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제안하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 해결의 시작은 언제나 아이디어입니다. 다만 여기에만 머문다면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사람들이 모두 디자이너겠죠. 하지만 우리가 디자이너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이 아이디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아이디어가 실체화, 구체화되어 소비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상태로까지 만들어내야 하죠. 한마디로 우리 디자이너들이 발상해낸 아이디어라 불리는 개념, 생각, 컨셉, 사상같은 것들을 소비자들이 느낄 수 있게 경험화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바로 ’디자인’입니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한 전단계 즉 아이디어라는 건물을 짓기 위한 설계도를 만드는 것이죠. 결국 아이디어가 경험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설계의 과정을 꼭 거쳐야합니다. 좋은 설계도는 좋은 경험을 소비자들에게 제공하고 그렇지 못한 디자인은 오히려 역효과를 냅니다. 설계가 제대로 됐다면 효과적으로 전달할 기술들은 그 후에도 얼마든지 구상할 수 있습니다. 거러니 표현하고 실체화하는 것에 앞서 설계를 제대로 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하겠습니다.

설계가 끝난 아이디어는 거기에 담길 메시지와 이미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 연출력이 필요합니다. 인상적인 경험으로 만들려면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등의 감각적인 것들도 잘 알고 이해해야합니다. 이런 점에서보면 디자이너는 감독의 자질과 함께 감독의 연출력이 빛나게 할 수 있는 배우로써의 면모도 갖추어야합니다. 아무리 좋은 연출도 표현이 제대로 안된다면 관객의 호응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죠. 연기를 직접 못하더라도 자신이 의도한 표현을 배우에게 세세하게 설명할 정도는 돼야하겠죠.

물론 이 두 능력 모두를 다 가질 수는 있는 디자이너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가 감독의 역할에 맞을지 배우가 더 어울릴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또한 연기력이 뛰어났던 배우가 좋은 감독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 경로를 생각해보는 것도 디자이너로서 성장하는데 있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디자이너를 정의한 것처럼 ‘좋은 아이디어를 인상적인 경험으로 바꾸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굳이 분야를 한계 지을 필요도 자신의 능력을 좁게 규정 지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 어떤 일을 하든 디자인적인 관점과 감각으로 내 아이디어를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의미있는 제안을 하는데 쓰일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디자이너로서의 자부심과 보람을 가지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